극동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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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극동 공화국은 러시아 내전 후반기에 소비에트 연방과 일본 간의 완충 지대로 설립된 국가이다. 1920년 4월 6일 수립되어, 초대 대통령은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쇼코프였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과 백군의 지원 속에서 볼셰비키의 지지를 받아 건국되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극동 지역을 통치했다. 1921년 백군의 쿠데타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여 재통일했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에 합병되어 1922년 11월 15일 소멸되었다. 수도는 치타였으며, 율 브리너를 비롯한 인물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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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공화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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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공식 명칭 | 극동 공화국 |
현지 명칭 | |
약칭 | |
수도 | 베르흐네우딘스크 (1920년 10월까지) 치타 (1920년 10월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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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정치 체제 | 단일 사회주의 공화국 |
대통령 |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쇼코프 (1920년~1921년) 니콜라이 마트베예프 (1921년~1922년) |
총리 |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쇼코프 (1920년) 보리스 슈미야츠키 (1920년~1921년) 표트르 니키포로프 (1921년) 니콜라이 마트베예프 (1921년~1922년) 표트르 코보제프 (1922년) |
역사 | |
건국 | 1920년 4월 6일 |
멸망 | 1922년 11월 15일 |
이전 국가 | 러시아 동방 변경 부랴트-몽골국 자바이칼 공화국 녹우크라이나 임시 전 러시아 정부 |
계승 국가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
경제 | |
통화 | 루블 |
기타 | |
현재 국가 | 러시아 |
위치 | 러시아 극동 |
국가 | (인터내셔널) |
2. 역사
10월 혁명 이후 집권한 볼셰비키는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으로 주둔 중인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자 완충 지대로서 극동 공화국 건국을 지원했다. 초대 대통령은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쇼코프였다.[3] 공화국은 표면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볼셰비키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1920년 4월 베르흐네-우딘스크(현 울란우데)에서 처음 수립되었고, 같은 해 여름 아무르 지역 소비에트 정부가 합류했다. 10월에는 백군 지도자 아타만 그리고리 세메노프가 그의 본거지인 치타에서 축출되면서 극동 공화국은 수도를 치타로 옮겼다.[2] 곧이어 블라디보스토크도 극동 공화국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1921년 5월,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 세력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프리아무르 임시정부를 세우고 극동 공화국으로부터 분리를 시도했다.[2] 이 시기 극동 지역에서는 백군과 일본군에 의한 폭력과 보복 행위가 빈번했으며, 특히 신한촌 사건과 같이 일본군이 한인 민간인을 학살하는 비극도 발생했다.[6] 극동 공화국 군대는 백군 반란 세력과의 전투를 지속했고, 1922년 10월 25일 마침내 블라디보스토크를 탈환하여 백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지역의 통일을 회복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함락과 일본군의 철수로 완충국으로서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자, 극동 공화국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합병을 요청했다. 1922년 11월 15일, 극동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에 통합되었다.[3][9]
2. 1. 설립 배경
극동 공화국은 러시아 내전 후반기에 세워졌다. 내전 기간 동안 러시아 극동 지역의 도시들은 대체로 지역 당국이 통제했으며, 백군 시베리아의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나 침략해 온 일본군과 협력하는 경향을 보였다. 1919년 “체코군단 구출”이라는 명분 아래 실제로는 사회주의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한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이 시작되었고, 특히 일본군은 바이칼호 서안까지 이르는 시베리아 철도 연선을 점령했다.그러나 일본이 지원한 백군의 주력인 콜차크 군이 1920년 1월 적군과 파르티잔의 공세로 와해되고, 미국의 압력 등이 더해지자 일본 정부는 시베리아에서의 철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1920년 봄 일본군이 자바이칼과 아무르주에서 철수하면서 이 지역에 정치적 공백 상태가 만들어졌다.[1]
이러한 배경에서, 10월 혁명으로 집권한 볼셰비키 정권은 일본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완충 지역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는 국내 혼란과 폴란드와의 전쟁 위협 등으로 인해 일본과의 전면전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블라디미르 레닌을 비롯한 모스크바 지도부는 약 7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과 미군의 존재를 고려하여, 극동 지역에 직접적인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기보다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완충 정권을 세우는 방안을 추진했다.[3] 이는 동부 전선에서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유사하게, 신생 소비에트 정권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재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5]
1920년 4월 6일, 베르흐네우딘스크(현재의 울란우데)에서 제헌 의회가 소집되어 극동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초대 대통령은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시초코프였으며, 공화국은 보통·직접·평등 선거 원칙에 따른 자유 선거 보장과 외국인 투자 유치를 약속하는 헌법을 채택했다.[3] 초기 공화국은 베르흐네우딘스크 주변 지역만을 관할했으나, 1920년 여름 아무르 지역의 소비에트 정부가 합류하면서 세력을 넓혔다. 표면적으로는 사회혁명당 등 여러 세력이 참여하는 민주 공화국 형태를 취했지만, 적군의 유능한 장교였던 바실리 블류헤르가 공화국 군대의 초대 사령관을 맡는 등 실제로는 볼셰비키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지역 내 혼란은 계속되었다. 1920년 10월, 백군 지도자 중 한 명인 아타만 그리 고리 세메노프가 그의 근거지였던 치타에서 축출되자, 극동 공화국은 수도를 치타로 옮겼다.[2] 1920년 11월 11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극동 임시 국민 의회가 열려 치타 정부를 승인하고, 1921년 1월 9일을 새로운 제헌 의회 선거일로 정했다.[3] 이후 미국 헌법과 유사한 내용의 새 헌법이 작성되어 1921년 4월 27일에 승인되었다.[3]
하지만 1921년 5월 26일, 일본 점령군의 지원을 등에 업은 백군 세력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프리아무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극동 공화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시도했다.[2] 이 시기 극동 지역에서는 폭력과 보복 행위가 끊이지 않았으며, 특히 신한촌 사건과 같이 일본군이 한인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비극도 발생했다.[6] 프리아무르 임시정부의 초기 지도자였던 메르쿨로프 형제는 1922년 6월 실각했고, 콜차크의 부하였던 디테리흐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극동 공화국 군대는 결국 백군 반란 세력을 격파하고 1922년 10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를 탈환하여 지역의 통일을 회복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함락 이후 일본은 북사할린을 제외한 점령지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완충국으로서의 역할과 존재 이유를 다한 극동 공화국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합병을 요청했고, 1922년 11월 15일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에 통합되었다.
2. 2. 건국 과정
러시아 내전 후반기, 10월 혁명 이후 집권한 볼셰비키 정권은 일본 제국의 시베리아 개입에 대응하고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피하기 위한 완충 지대가 필요했다. 당시 시베리아에는 약 7만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며 반혁명 세력인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고, 1918년부터 극동 해안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만주 국경 지대 등을 점령하고 있었다.[3] 미국 역시 시베리아 주둔 미국 원정군을 파견했으나, 윌리엄 S. 그레이브스 장군 지휘 하의 미군은 1920년 4월 1일 철수하면서 일본이 볼셰비키가 상대해야 할 유일한 주요 점령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4]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일본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고 내부 체제를 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극동 지역에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완충 국가 수립을 구상했다. 이는 블라디미르 레닌을 비롯한 모스크바 지도부의 결정으로, 약 7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의 존재와 폴란드와의 전쟁 위협 등 국내외적 어려움을 고려한 전략적 판단이었다.[3][5] 러시아 공산당 내 일부는 이러한 결정에 반대하기도 했으나, 레닌 등 지도부는 일본과의 충돌 가능성을 우려했다.[3]
1920년 4월 6일, 베르흐네우딘스크(현 울란우데)에서 제헌 의회가 급히 소집되어 극동 공화국의 수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쇼코프가 선출되었고,[3] 공화국은 보통·직접·평등 선거 원칙에 따른 자유 선거 보장과 외국인 투자 유치를 약속했다.[3] 바실리 블류헤르와 같은 적군 출신 인사가 공화국군 사령관을 맡는 등 초기부터 볼셰비키의 강한 영향력 하에 있었으나, 표면적으로는 온건 사회주의자들이 정부를 주도했다.[2]
극동 공화국은 처음에는 베르흐네우딘스크 주변 지역만을 통치했으나, 1920년 여름 아무르 지역의 소비에트 정부가 합류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의 지원을 받던 백군 지도자 아타만 그리고리 세묘노프가 그의 근거지인 치타에서 축출되자[3] 극동 공화국의 수도는 치타로 이전되었다.[2] 1920년 말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임시 국민 의회도 치타 정부를 인정하고 극동 공화국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으며, 1921년 1월 9일 새로운 제헌 의회 선거일이 정해졌다.[3] 이후 1921년 4월 27일에는 미국 헌법과 유사한 내용의 새로운 헌법이 승인되었다.[3]
그러나 건국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920년부터 1922년 사이 일본군은 점령지에서 러시아인들의 저항에 부딪혀 점차 철수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극동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시기 극동 지역에서는 폭력 사태와 보복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며,[2] 특히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의 한인 거주지인 신한촌에서는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한인 민간인이 학살당하는 비극적인 신한촌 사건도 일어났다.[6] 또한, 1921년 5월 26일에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 세력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프리아무르 임시정부를 세우는 등 내부적인 혼란도 지속되었다.
2. 3. 내전과 갈등
러시아 내전 후반기에 극동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러시아 극동 지역의 도시들은 대체로 지역 당국이 통제했으며, 시베리아의 백군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와 침략해 온 일본군과 협력하는 경향이 있었다. 1919년 “체코군단 구출”이라는 명분 아래 실제로는 사회주의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한 시베리아 출병이 시작되었고, 특히 그 중심인 일본군이 바이칼호 서안까지 이르는 시베리아 철도 연선을 중심으로 러시아 극동 지역을 점령했다. 일본은 약 7만 명의 병력을 파병하여 반혁명 세력인 백군을 지원하였다.[3]그러나 1920년 1월, 일본이 지원한 백군의 주력인 콜차크 군이 적군과 파르티잔의 공세로 와해되고, 미국의 압력 등이 더해지자 일본 정부는 시베리아 철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1920년 봄 일본군이 자바이칼과 아무르주에서 철수하면서 정치적 공백이 발생했다.[1] 1920년 4월 1일에는 윌리엄 S. 그레이브스 장군이 이끄는 시베리아 주둔 미국 원정군도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면서, 일본은 볼셰비키가 협상해야 할 유일한 주요 점령 세력이 되었다.[4]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일본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내부 정비 시간을 벌기 위해, 극동 지역에 완충국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모스크바 지도부가 약 7만 명의 일본군과의 충돌을 우려했기 때문이며[3], 극동 공화국 수립을 동부 전선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유사한 전략적 후퇴로 간주했다.[5] 일부 볼셰비키 당원들은 이에 반대했지만[3], 결국 1920년 4월 6일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제헌 의회가 소집되어 극동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초대 대통령은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쇼코프였으며, 바실리 블류헤르가 공화국군 초대 사령관이 되었다. 공화국은 자유 선거와 외국인 투자를 보장하는 헌법을 약속했다.[3]
처음 극동 공화국은 베르흐네우딘스크 주변 지역으로만 구성되었으나, 1920년 여름 아무르 지역의 소비에트 정부가 합류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이 적군과의 휴전 협정에서 완충국을 인정하면서 사실상 아타만 그리고리 세메노프와 그의 러시아 동부 변방 세력을 버렸고[3], 세메노프는 자신의 본거지인 치타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극동 공화국의 수도는 치타로 옮겨졌다.[2] 1920년 11월 11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극동 임시 국민 의회가 치타 정부를 인정하고 새로운 제헌 의회 선거일을 정했다.[3] 미국 헌법과 유사한 새 헌법은 1921년 4월 27일에 승인되었다.[3]
그러나 극동 공화국의 수립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920년에서 1922년 사이에는 폭력, 학살, 보복이 주기적으로 발생했으며[2], 특히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의 한인 거주지 신한촌에서는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한국 민간인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6]
또한, 우익 세력은 민주 공화국 수립을 거부했다. 1921년 5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프리아무르 임시정부[7]라는 새로운 정권을 프리모리예 변경주에 수립했다.[2] 이들은 극동 공화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시도했다. 쿠데타 직후 아타만 세묘노프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최고 사령관이 되려 했으나 일본의 외면으로 실패했다.[8] 프리아무르 임시정부는 사업가인 스피리돈 메르쿨로프와 니콜라이 메르쿨로프 형제가 이끌었으나, 반볼셰비키 세력 규합에는 어려움을 겪었다.[9]
1922년 6월, 일본이 10월 말까지 시베리아에서 모든 군대를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하자[9] 백군 세력은 동요했다. 7월에는 지엠스키 소보르가 메르쿨로프 형제를 축출하고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출신 장군 미하일 디테리히스를 군사 독재자로 임명했다.[9] 일본군이 철수하자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으로 활동한 적군이 동쪽으로 진격했고, 디테리히스를 포함한 수천 명의 백군 잔당과 러시아인들이 해외로 탈출했다.[2] 극동 공화국 군대는 마침내 1922년 10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를 탈환하여 백군 세력을 제압하고 통일을 이루었으며, 이로써 러시아 내전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내전이 끝나고 완충국으로서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자, 극동 공화국 정부는 스스로 해산을 결정하고 1922년 11월 15일 소비에트 러시아에 합병되었다.[3][9] 모든 권한과 영토는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정부에 이양되었다.[9]
2. 4. 소비에트 연방으로의 통합
1920년 콜차크가 이끄는 백군 주력이 적군과 파르티잔의 공세로 무너지자, 시베리아에 개입했던 일본군은 철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1920년부터 1922년 사이 일본군은 러시아인들의 저항에 부딪혀 점차 철수하고 있었다.그러나 1921년 5월 26일, 일본 점령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 세력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프리아무르 임시정부를 세우고 극동 공화국으로부터 이탈을 시도했다. 초기 지도자였던 메르쿨로프 형제는 1922년 6월 실각했고, 콜차크의 부하였던 디테리흐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1922년 여름,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철수하자 백군 진영은 혼란에 빠졌다.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으로 위장한 적군이 동쪽으로 진격하자, 디테리흐스를 포함한 수천 명의 백군 잔여 세력과 반볼셰비키 인사들은 새로운 정권을 피해 해외로 망명했다.[2] 극동 공화국 군대는 이들을 격파하고 1922년 10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여 백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지역을 재통일했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 내전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함락과 일본군의 철수로 완충지대로서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 극동 공화국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합병을 요청했다. 1922년 11월 15일, 극동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에 병합되었다.[3] 극동 공화국 정부는 스스로 해산하고 모든 권한과 영토를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정부에 이양했다.[9]
2. 5. 통합 이후
일본 제국은 1920년 5월부터 6월 사이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서 약 700명의 일본 민간인과 군인이 학살당한 니콜라옙스크 사건에 대한 보상이라는 명목으로, 1925년까지 사할린 북부를 점유했다.[4] 하지만 이러한 명분은 러시아 파르티잔의 행위에 대한 일본 제국의 보복 과정에서 발생한 러시아인 희생자가 일본인 희생자의 두세 배에 달했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었다.[4]3. 영역
극동 공화국의 영토는 이전 러시아 제국의 자바이칼, 아무르, 연해주, 그리고 사할린섬 북부 지역을 포함했다.[1] 서쪽 국경은 바이칼호 서쪽 해안선부터 몽골과 중국(만주)의 북쪽 국경까지 이어졌고, 동쪽으로는 일본해와 오호츠크해에 이르렀다. 초기에는 캄차카 반도와 축치 자치주까지 포함했으나, 내전 중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고 1920년 12월 30일 모스크바 정부와의 조약으로 캄차카주를 할양했다. 부랴트 공화국 지역은 소련과 극동공화국이 분할하여 관리했다.
극동 공화국은 현재의 러시아 극동 지역, 즉 바이칼호 동쪽의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아무르강 유역에 해당하며, 오늘날의 부랴트 공화국, 하바롭스크 지방, 프리모르예 지방 등을 포함한다.
총면적은 약 약 1890681.92km2로 추산되었고, 인구는 약 350만 명이었다.[1] 이 중 러시아인이 약 162만 명이었고, 중국, 일본, 몽골, 한국계 등 아시아계 인구가 100만 명 이상이었다.[1]
상당한 광물 자원을 보유하여 러시아 전체 금 생산량의 약 1/3을 차지했으며, 국내 유일의 주석 생산지였다.[1] 그 외 아연, 철, 석탄 등도 매장되어 있었다.[1]
연해주 지역의 어업은 아이슬란드의 어획량을 넘어서는 규모였으며, 청어, 연어, 철갑상어 등이 풍부했다.[1] 또한, 120e6acre가 넘는 광대한 삼림 자원을 보유하여 소나무, 전나무, 삼나무, 버드나무, 자작나무 등이 풍부했다.[1]
수도는 초기에 베르흐네우딘스크(현재의 울란우데)였으나, 1920년 10월 이후 치타로 이전했다. 이 때문에 '''치타 공화국'''이라고도 불린다.
4. 인물
(내용 없음)
4. 1. 역대 정부주석(국가원수)
wiki이름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비고 |
---|---|---|---|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쇼코프 Александр Краснощёковrus | 1920년 4월 6일 | 1920년 4월 29일 | 임시 |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쇼코프 Александр Краснощёковrus | 1920년 4월 29일 | 1921년 12월 | |
니콜라이 마트베예프 Николай Матвеевrus | 1921년 12월 | 1922년 11월 15일 |
4. 2. 역대 내각회의 의장 (총리)
wiki이름 | 재임 기간 |
---|---|
알렉산드르 크라스쉬쵸코프 | 1920년 4월 6일 – 1920년 11월 |
보리스 슈먀츠키 | 1920년 11월 – 1921년 4월 |
표트르 니키포로프 | 1921년 5월 8일 – 1921년 12월 |
니콜라이 마트베이예프 | 1921년 12월 – 1922년 11월 14일 |
표트르 코보제프 | 1922년 11월 14일 – 1922년 11월 15일 |
4. 3. 극동 공화국 출신 유명 인물
- 율 브리너 (Yul Brynner, 1920년 7월 11일 – 1985년 10월 10일): 배우
5. 군사
극동 공화국의 군대는 인민혁명군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인민혁명군은 러시아 내전 말기 극동 지역에서 백군 세력을 최종적으로 격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10][11]
5. 1. 인민혁명군
1922년 7월 20일, 제104 발라간스크 소총여단은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의 제1 트란스바이칼 소총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이 사단은 창설 이후 만주와의 국경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1922년 10월 4일부터 25일까지 극동 백군의 마지막 잔당인 젬스카야 라트를 격파하기 위한 프리모르스키 작전에 참가했다. 작전 중 제1 트란스바이칼 소총사단은 그로데코보, 니콜스크-우스리스키, 블라디보스토크 점령 전투에 참여했다.러시아 SFSR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1922년 11월 16일 명령에 따라,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은 제5군(제4차 편성)으로 개칭되어 새롭게 창설되었다. 제1 트란스바이칼 소총사단은 이 제5군의 지휘 아래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하게 되었다. 태평양 연안에서 백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하고 연안 지역에 주둔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이 사단은 1922년 11월 22일 제1 태평양 소총사단(1-я Тихоокеанская стрелковая дивизия|1-야 티호케안스카야 스트렐코바야 디비지야ru)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0][11]
참조
[1]
간행물
The Far Eastern Republic
1922-02-15
[2]
서적
Critical Companion to the Russian Revolution, 1914–1921
Indiana University Press
1997
[3]
서적
Dictionary of the Russian Revolution
Greenwood Press
1989
[4]
서적
White Siberia: The Politics of Civil War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1996
[5]
서적
White Siberia
1996
[6]
웹사이트
4월참변 (四月慘變)
https://encykorea.ak[...]
2023-08-21
[7]
서적
Russia's Frozen Frontier: A History of Siberia and the Russian Far East 1581 - 1991
https://books.google[...]
A&C Black
2022-09-19
[8]
서적
White Siberia
1996
[9]
서적
White Siberia
1996
[10]
웹사이트
39-я Тихоокеанская Краснознаменная стрелковая дивизия
http://www.rkka.ru/h[...]
Rkka.ru
2022-03-21
[11]
웹사이트
Историческая справк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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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ncil of Veterans of the 392nd District Training Centre
2017-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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